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라이 타카히로 (문단 편집) === [[히로시마 도요 카프]] 시절 =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辛くない広島新井.jpg |width=100%]]}}} || 대학 시절까지 특출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, 대학 선배이자 카프의 주전 [[유격수]]였던 [[노무라 켄지로]]의 집에 직접 찾아가 본인의 스윙을 보여주며 호감을 산 덕인지 하위 지명이지만 무사히 히로시마 카프에 입단할 수 있게 되었다. 하위 지명으로 입단하긴 했으나, 데뷔 시즌부터 백업 멤버 자리를 확보하여 7홈런을 기록하는 등 순조롭게 1군에 정착했고, 이후 서서히 출장기회를 늘려가며 3년차까지 각각 16-18홈런을 치는 등 거포로써 순조롭게 성장해 가다 2002년 처음으로 전시합 출장+규정타석 도달과 함께 타율 .287/OPS .855, 28홈런 75타점을 기록하며 카프의 중심타선으로 자리잡았다. 시즌 종료 후엔 [[카네모토 토모아키]]가 [[FA 제도|FA]]로 [[한신 타이거스]]에 이적한 후 4번 타자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4번 타자의 중압감이 워낙 강했던 것인지 심한 타격 슬럼프를 겪으면서 2003~2004시즌엔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게 된다. 2년간 부진한 성적을 이어갔지만, 2005년에 타격 슬럼프에서 탈출하고 장타 포텐이 폭발하면서 6경기 연속 홈런을 터뜨리는 등의 맹활약과 함께 타율 .305/OPS .956, '''43홈런''' 94타점을 기록하며 홈런왕 타이틀과 더불어 1루수 부문 베스트나인을 수상하는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.[* 일본 기록은 [[랜디 바스]], [[오 사다하루]]의 7경기 연속 홈런이 최다다.][* 하지만 당시 홈구장이던 [[히로시마 시민 구장]]의 작은 크기 때문에 홈구장 버프의 거품이란 소리를 들었다. 실제로 [[실황 파워풀 프로야구]] 시리즈에서는 시민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던 시절 제작진들이 히로시마 선수들의 홈런 갯수에 비해서 장타력을 제법 너프시키는 경향이 있었다.(2009년 시민구장보다 그라운드가 커진 [[마쓰다 줌줌 스타디움 히로시마]]로 옮긴 이후엔 장타력을 너프시키는 경향이 사라졌다.) 아라이는 한신 이적 후 40+홈런은 커녕 20개를 넘기지도 못하게 되었는데, 여기에는 요통으로 인한 타격폼 변경과 나이로 인한 노쇠화도 어느 정도 작용했으나 무엇보다 히로시마 시민 구장보다 외야가 훨씬 넓은 [[한신 코시엔 구장]]을 홈으로 쓰게 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. 상승기류 때문에 구조적으로 타구가 뻗어나가는 [[도쿄돔]]의 홈런을 돔런이라고 부르듯이,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의 홈런을 [[탁구장]]에서 치는 거나 다름없다며 탁런이라고 부르는 국내팬들도 있었다.] 이후 2006년에는 25홈런 100타점, 2007년에는 28홈런 102타점을 기록하며 카프의 주포로 맹활약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